설교본문: 롬 1:16-17 제목: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설교: 이양호 목사(연세대)
루터는 신약성경을 번역하며 전체 서문과 함께 각 권마다 서문을 썼다. 루터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 루터는 신약성경 전체 서문 말미에 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1537년 이후 서문에서 해당 문단은 삭제)이라고 했을까?
루터는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지 않았다. 루터는 아브라함의 이삭 바치는 사건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이 그 결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쳤다>고 이해했다.
하나님의 義는 징벌적 의와 구원하시는 의로 나눌 수 있다. 루터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죄인을 심판하신다는 징벌적 義를 두고 번민하다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義를 깨닫고 낙원에 이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부터 루터는 성경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義는, 당신이 의로우시기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義이다. 이제 루터는 두 종류의 의를 말한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義, 그리고 우리가 실제 義를 행하는 것이다(육을 죽임).
루터가 처음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는데, 우리가 실제로 루터를 따르는가? 한국 교회가 루터를 따른다 하나, 루터를 읽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이것이 문제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우 강조했다.
본문의 <믿음으로>라는 구절은 우리말 성경에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번역했으나, 헬라어와 라틴어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義로 산다>고 번역될 수도 있다. 이 번역이 루터식 해석에 더욱 가깝다. 믿음은 행함을 포함하기에 자연스러운 믿음의 행위가 나온다. 절대 믿음에 행위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루터가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게 된 배경이 있다. 종교개혁 전 루터도 가톨릭에서 그러하듯 聖人을 찾았다(벼락칠 때 聖 안나를 찾음). 그러나 루터는 이런 사람들이 결코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가 수도사였을 때, 聖人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그때 루터는 성인이라면 청빈하고 극도로 절제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가 성경을 연구하니 성경에는 聖人이 많이 나와 있음을 깨달았다. 즉 성경이 말하는 聖人은 수도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聖人이었다. 가톨릭이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聖人으로 만들었다면, 루터는 땅의 聖人을 주장했다. 우리가 다 聖人이다. 우리 이름 앞에 saint를 붙이자. 이것이 만인사제설이다. 하늘의 聖人이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루터가 <오직 은혜로>를 말하는 것은 중세 가톨릭은 행함만 강조했고, 루터는 이에 반해 은혜만을 강조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부족하다. 루터는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 특히 산상설교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지켜야할 주님의 말씀이라고 루터는 생각했다. 이처럼 루터야말로 행함을 강조했다. 다만 루터는 우리의 힘으로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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